결국은 또 도구 탓을 하며 시작된 방랑
매일같이 압축 파일을 주고받는 게 일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쓰고 있던 7-Zip의 그 투박한 인터페이스가 너무 지겨워졌다. 성능이야 확실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윈도우 95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한 그 느낌이 업무 의욕을 깎아먹는 것 같았달까. 그렇다고 유료인 WinRAR을 쓰자니 매번 뜨는 구매 권장 팝업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게 PeaZip이었다. ‘오픈 소스’, ‘200가지 이상의 형식 지원’, ‘세련된 인터페이스’. 이 세 가지 키워드에 홀린 듯 설치 버튼을 눌렀다. 사실 처음에는 그냥 압축만 잘 풀리면 장땡이지 싶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내 업무 습관을 많이 흔들어 놓을 줄은 몰랐다. 처음 설치하고 실행했을 때의 그 깔끔한 첫인상은 정말 좋았다. ‘아, 이제 드디어 정착할 곳을 찾았구나’ 싶은 안도감이 들었다.
첫 번째 시행착오: 욕심이 부른 컨텍스트 메뉴의 비극
설치 과정에서 나는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 ‘윈도우 탐색기 통합’ 옵션을 보면서, ‘다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모든 체크박스를 다 눌러버린 것이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설치를 마치고 파일 하나를 오른쪽 클릭했는데, 메뉴가 모니터 끝까지 내려가는 걸 보고 경악했다. 압축하기, 압축 풀기, 각각의 형식으로 압축하기, 메일로 보내기… 온갖 옵션들이 컨텍스트 메뉴를 점령해버렸다. 정작 내가 자주 쓰는 ‘여기에 풀기’를 찾으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헤매야 했다.
결국 이걸 정리해보겠다고 프로그램 설정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정 메뉴가 생각보다 너무 방대했다. 어디서 이 메뉴들을 끄는지 한참을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프로그램을 삭제한 뒤 다시 설치했다. 이번에는 아주 신중하게 필요한 것만 골랐다. ‘아, 역시 과유불급이구나’를 뼈저리게 느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내 작업 흐름에 맞지 않는 기능을 덕지덕지 붙이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깨닫는 과정이었다. 그냥 기본값으로 둘 걸 그랬나 싶어 잠시 현타가 오기도 했다.
두 번째 시행착오: 지원한다면서요? 왜 안 열리는 건데
PeaZip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200가지 이상의 형식을 지원한다는 점이다. 마침 외장 하드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10년 전 대학 시절의 백업 파일들을 정리할 기회가 생겼다. 그중에는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ACE 형식과 아주 오래된 CAB 파일들이 섞여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PeaZip으로 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웬걸, 오류 메시지가 뜨면서 파일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히 지원한다고 써 있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PeaZip 자체는 오픈 소스 기반이라 라이선스 문제나 기술적 이유로 일부 형식은 별도의 외부 플러그인을 활성화하거나 경로를 설정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ACE 같은 구식 포맷이 그랬다. 구글링을 해서 라이브러리를 찾고, 설정 파일 경로를 맞추는 과정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냥 7-Zip 쓸 때는 대충 다 열렸던 것 같은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기술적으로 막혔다기보다는, 내가 기대했던 ‘알아서 다 해주는 만능 도구’라는 이미지와 실제 사용 환경 사이의 괴리가 컸다. 결국 한두 시간 정도 씨름한 끝에 해결하긴 했지만, ‘무료 도구를 쓰려면 이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 하는구나’라는 씁쓸한 교훈을 얻었다.
RAR5와 유니코드, 그리고 묘한 느림의 미학(?)
어느 날 동료가 RAR5 형식으로 압축된 대용량 파일을 보내왔다. 예전 버전의 압축 프로그램들은 이걸 제대로 못 읽어서 고생하곤 했는데, PeaZip은 다행히 RAR5를 완벽하게 지원했다. 여기서 한 번의 판단 과정이 필요했다. 평소처럼 드래그 앤 드롭으로 풀 것인가, 아니면 오른쪽 클릭 메뉴를 쓸 것인가. PeaZip은 드래그 앤 드롭 방식이 굉장히 직관적이긴 한데, 묘하게 반응 속도가 한 박자 늦는 느낌이 있다.
파일을 끌어서 창에 놓으면 바로 작업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내부적으로 한 번 더 검증을 거치는 듯한 딜레이가 발생한다. 성격 급한 한국 사람으로서 이건 좀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우클릭 -> 바로 풀기’를 선택해서 실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여기서 또 미묘한 점을 발견했다. 유니코드가 포함된 한글 파일명들이 깨지지 않고 잘 풀리긴 하는데, 파일 개수가 수천 개가 넘어가니 전체적인 리소스 점유율이 꽤 높게 올라갔다. CPU 팬이 도는 소리를 들으며 ‘이게 과연 효율적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결과물이 완벽하니 일단은 합격점을 주기로 했다. 느리긴 해도 일은 확실하게 한다는 느낌이었다.
파일 관리자로서의 변신, 그리고 뜻밖의 유용함
압축 프로그램으로만 쓰기에는 PeaZip의 기능이 너무 많아서, 파일 관리자 기능도 한 번 써보기로 했다. 특히 중복 파일 찾기 기능이 궁금했다. 업무용 폴더에 똑같은 파일이 이름만 다르게 저장된 경우가 많아서 늘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이 기능을 실행했을 때, 처음에는 ‘이게 지금 돌아가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화면 변화가 없어서 당황했다. 하지만 잠시 기다리니 해시값을 대조해서 정확하게 중복 파일을 찾아내 주는 걸 보고 감탄했다.
파일 해시 검증 기능도 유용했다. 인터넷에서 받은 중요한 설치 파일이 변조되지 않았는지 확인할 때 따로 도구를 쓸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하지만 이런 기능들이 PeaZip이라는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 다 들어있다 보니, 메뉴 구조가 좀 복잡해진 건 사실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 다기능이 축복이지만, 그냥 빨리 압축만 풀고 싶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메뉴를 찾는 데 시간을 더 쓰게 만드는 불편함이 있었다. 테마를 바꿔가며 내 취향에 맞게 꾸미는 재미는 쏠쏠했지만, 정작 중요한 파일 관리 효율은 상황에 따라 극과 극을 달렸다.
보안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번거로움
마지막으로 테스트해본 건 ‘안전 삭제’와 암호화 기능이었다. 민감한 프로젝트 문서를 삭제할 때 복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능인데, 이건 정말 확실했다. 하지만 너무 확실해서 문제였다. 실수로 지우면 나도 못 살린다는 압박감 때문에 매번 버튼을 누를 때마다 손이 떨렸다. 게다가 이중 인증까지 지원하는 암호화 기능은 보안성 면에서는 훌륭하지만, 매번 암호를 입력하고 키 파일을 대조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로웠다.
결국 내린 결론은, ‘정말 중요한 파일이 아니면 굳이 이렇게까지 써야 할까?’였다. 분명히 보안 기능은 뛰어나고 암호 관리 기능도 편리하지만, 데일리 업무용으로는 과한 측면이 있었다. 도구가 나쁜 게 아니라, 내가 내 업무 수준에 비해 너무 강력한 도구를 들고 휘두르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안이 철저해질수록 내 자유도는 떨어진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PeaZip을 쓰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아직은 진행 중인 PeaZip 적응기
솔직히 말해서 PeaZip으로 완전히 정착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망설여진다. 예전보다 인터페이스는 훨씬 예뻐졌고, 지원하는 형식도 많아져서 든든하긴 하다. 하지만 가끔씩 느껴지는 미세한 래깅(lagging)이나, 너무 많은 기능 때문에 생기는 복잡함은 여전히 적응 대상이다. 특히 급하게 파일을 처리해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다시 7-Zip으로 손이 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PeaZip은 나에게 ‘예쁜데 좀 예민하고 할 줄 아는 건 많은 친구’ 같은 존재가 됐다. 파일 형식이 특이하거나 보안이 중요한 작업에는 이만한 게 없지만, 가벼운 일상 업무에서는 여전히 계륵 같은 면이 있다.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이 불편함들을 안고 가면서, 아마 나는 또 다른 설정값을 건드려보거나 새로운 테마를 적용해보며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원래 업무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 자체가 이런 시행착오의 반복 아니겠는가. 내일은 또 어떤 플러그인이 말썽을 부릴지,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편리한 기능을 발견하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대로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