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매달 빠져나가는 돈이 아까워서 시작된 모험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냥 오기였다. 그래픽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도 아닌데, 가끔 로고 하나 만들고 아이콘 몇 개 수정하겠다고 매달 수만 원씩 어도비(Adobe)에 갖다 바치는 게 너무 아까웠다. 소위 말하는 ‘구독 경제’의 노예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무료로 쓸 수 있는 오픈 소스 툴로 갈아타기로. 검색해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띈 게 Inkscape(잉크스케이프)였다. 전문가용 그래픽 앱이라느니, 일러스트레이터와 경쟁한다느니 하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심지어 설치가 필요 없는 포터블 버전도 있단다. ‘이거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한 게 모든 삽질의 시작이었다.
1. 첫 번째 시도와 실패: “웹 툴이면 충분할 줄 알았지”
Inkscape를 본격적으로 파기 전에 사실 다른 꼼수를 먼저 부려봤다. 요즘 잘나가는 피그마(Figma)나 캔바(Canva) 같은 웹 기반 툴들 말이다. ‘요즘 세상에 무슨 프로그램을 깔아서 써? 그냥 웹에서 대충 선 긋고 도형 합치면 끝이지’라고 생각했다. 처음 한 시간은 행복했다. 인터페이스도 세련됐고 반응도 빨랐다.
그런데 복잡한 로고의 경로(Path)를 깎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특정 부분을 정교하게 합치거나(Boolean operation) 노드를 하나하나 수정해서 곡률을 잡으려니, 내가 원하는 만큼의 세밀한 조정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오프라인 환경에서 작업해야 할 때나 파일 형식을 변환할 때 제약이 너무 컸다. 결국, 단순한 레이아웃 잡기에는 좋았지만 ‘그리기’라는 본질적인 작업에서는 한계에 부딪혔다. 여기서 첫 번째 후퇴를 했다. “역시 정교한 벡터 작업은 전용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하는구나”라는 뼈저린 교훈과 함께.
2. Inkscape와의 첫 대면: “이거 90년대 프로그램인가?”
큰 마음 먹고 Inkscape를 깔았다. 첫 느낌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어도비의 세련된 다크 모드와 직관적인 아이콘에 익숙해진 눈에는 잉크스케이프의 인터페이스가 너무 투박해 보였다. 메뉴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뭔가 아이콘들도 ‘나 오픈 소스예요’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공짜니까 참기로 했다.
기본적인 드로잉부터 시작해봤다. 텍스트를 넣고, 객체를 복제하고, 그룹화하는 건 의외로 직관적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싶어서 예전에 작업해둔 복잡한 PDF 파일을 불러와 봤다. 여기서 두 번째 실패가 찾아왔다. 레이어는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렸고, 렌더링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특히 고해상도 비트맵이 섞여 있는 파일에서는 마우스 커서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컴퓨터 사양이 나쁜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싶어 화가 났다. 설정값을 바꿔보고 명령줄 옵션까지 뒤져봤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 프로그램의 로직에 내 작업 방식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상식을 버려야 했다.
3. 노드와의 사투, 그리고 어설픈 승리
한번은 지인의 부탁으로 오래된 로고를 벡터로 다시 따야 하는 작업이 있었다. 해상도가 낮은 비트맵 파일을 넣고 ‘비트맵 추적(Trace Bitmap)’ 기능을 실행했다. 어도비라면 클릭 한 번에 끝났을 일인데, 잉크스케이프는 나에게 수많은 선택지를 던졌다. 밝기 경계값, 가장자리 탐지, 색상 수… 처음에는 대충 기본값으로 눌렀다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탄생하는 걸 보고 좌절했다.
여기서부터 진짜 삽질이 시작됐다. 수십 번 설정을 바꿔가며 최적의 값을 찾으려 노력했다. 겨우 외곽선을 따냈지만, 이번엔 노드가 너무 많아서 선이 울퉁불퉁했다. 노드 편집 도구를 들고 수작업으로 노드를 하나씩 지우고 핸들을 돌려가며 곡선을 다듬었다. 손목은 아파오고 눈은 침침해졌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라는 독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한 노드 한 노드 깎아내며 내가 원하는 모양이 잡혀갈 때의 쾌감은 묘했다. 결국 결과물은 꽤 근사하게 나왔다. 비록 어도비로 했으면 30분 걸렸을 일을 3시간 동안 붙잡고 있었지만, 어쨌든 ‘무료 툴로도 이게 되는구나’라는 실질적인 경험을 얻은 순간이었다.
4. 실전에서 느낀 일러스트레이터와의 결정적 차이
잉크스케이프를 써보며 느낀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자유도’다. 오픈 소스답게 고급 기능들이 정말 풍부하게 들어있다. 그라디언트 편집기나 패턴 채우기 같은 기능은 유료 툴 못지않게 강력하다. 특히 노드 연산이나 경로 마커 같은 기능은 쓰다 보면 ‘이런 것까지 된다고?’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다. 설치가 필요 없는 포터블 버전은 USB에 담아가지고 다니며 아무 컴퓨터에서나 바로 작업할 수 있어 정말 편했다.
반면, 불편함도 명확하다. 일단 CMYK 지원이 미비하다. 인쇄용 작업을 주로 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별도의 플러그인을 깔거나 복잡한 설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이 너무 번거롭다. 또한, 사용자 커뮤니티가 있긴 하지만 어도비만큼 방대한 튜토리얼을 찾기 어렵다. 뭔가 막혔을 때 구글링을 한참 해야 하거나, 때로는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해결해야 한다. 대형 파일을 다룰 때의 불안정한 렌더링 성능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5. 완벽하지 않은 정착, 그래도 나쁘지 않은 선택
지금 내 컴퓨터에는 Inkscape가 메인 그래픽 툴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걸 ‘완벽한 대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어떤 작업은 답답해서 한숨이 나오고, 가끔 프로그램이 예기치 않게 종료될 때면 허공을 향해 욕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요령이 생겼다. 무거운 파일은 미리 최적화를 하고, 수시로 저장을 하며, 프로그램의 특성에 맞춰 작업 순서를 조절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Inkscape는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최고의 축복이다. 하지만 ‘돈을 내더라도 편하게 작업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높은 벽일 수 있다. 세상에 완벽한 툴은 없고, 모든 문제는 결국 사용자의 적응력에 달려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도 내 작업 표시줄에는 투박한 눈 모양의 아이콘이 떠 있다. 오늘도 나는 이 녀석과 씨름하며, 아마 내일도 비슷한 삽질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매달 빠져나가는 구독료 문자를 안 봐도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고생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